1. 발칸 분쟁
민족 구성이 복잡하고 여러 종교가 혼재하는 발칸반도는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라고 불립니다. 발칸지역은 로마를 동서로 나누었던 지점이자 수많은 민족이 얽혀있는 곳이며 고대부터 아시아와 유럽지역을 연결하는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지정학적 요인으로 이지역은 민족 간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또 강대국들은 발칸반도를 이 대륙에서 저 대륙으로 세력을 뻗기 위해 거쳐 지나가는 거점으로 여겼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1차 세계전 발발 직전에 발칸동맹의 회원국들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 이어서 세르비아, 그리스,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간에 2차에 걸친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2차 대전 종전 후에 발칸반도에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이 건국되었습니다. 유고연방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6개 공화국과 코소보, 보이보디의 2개 세르비아 자치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유고연방의 정치지도자였던 티토는 6개 민족으로 구성되있던 구 유고연방이 자신의 사후에 해체될 것을 우려하여 민족문제에 대한 정치적 연설을 금지하는 등 여러 가지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코소보 지역에 자치권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992년 유고연방이 해체되면서 민족분쟁이 표면에 부상했니다.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공화국, 보스니아-헤르체코비니아가 분리 독립을 하는 과정에서 전쟁이 발생했습니다. 세르비아계 정치지도자 슬로보단 밀로비치는 극단적 민족주의 깃발을 내걸었습니다. 세르비아인이었던 그는 코소보지역 세르비아인들의 민족적 감정을 부추겨 '대세르비아주의', 즉 세르비아인에 의한 남슬라브족의 정치적 통일을 이루려는 민족주의를 제창하며 유고연방을 몇 개의 민족별 나라로 분리시키고 신 유고연방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궁극적인 목적은 민족적 성지인 코소보를 세르비아에 합병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주변의 민족주의와 충돌하면서 크로아티아 내전, 보스니아 내전, 코소보 내전 등 발칸반도 유혈투쟁으로 연결되었습니다. 그는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 유고전범재판소에서 인종 학살, 전쟁범죄, 반인륜죄를 저지른 혐의로 재판을 받던 중 사망했습니다. 보스니아 내전은 발칸반도의 복잡한 민족 구성과 역사가 원인이 되어 탈냉 이후 보스니아 회교정부 및 크로아티아와 신유고연방의 지원을 받는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 사이에서 발생한 분쟁입니다. 유고연방이 해체되기 시작할 무렵인 1992년 보스니아는 유고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고, 보스니아 내 소수민족인 세르비아계도 보스니아에서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이어 1992년 4월 유럽연합이 보스니아의 독립을 승인하자 이에 반발한 세르비아계와 유고연합군은 보스니아 회교정부를 공격했습니다. 탈냉전 이후 보스니아 내전은 유럽안보를 위협하는 가장 큰 요소로 등장하였고 이에 개입을 미루어 오던 UN이 군사개입을 천명하고 나섰습니다. 휴전과 분을 반복하던 보스니아 내전은 1995년 12월 미국의 주도하에 극적으로 분쟁 당사자와 신유고연방 간에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전환을 맞게 됩니다. 코소보는 알바니아계 주민이 전 인구의 80% 가까이를 차지하지만 영토는 신유고연방에 속해 있는 자치 주입니다. 그래서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세르비아로부터의 분리 독립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1998년 3월 초 코소보의 알바니아 분리주의 반군들이 세르비아 경찰을 공격하면서 코소보사태가 시작되었습니다. 보스니아 내전의 종식으로 한동안 잠잠하던 발칸반도가 다시 전화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세르비아 경찰은 즉각 반격에 나서 반군은 물론, 반군 거점지역의 주민들을 대량 학살하였습니다. 이에 맞서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코소보해군을 중심으로 게릴라전을 펼쳤습니다. 1998년 3월 31일 UN은 유고연방에 대한 무기금수조치를 내렸으며, 1998년 4월 세르비아의 탄압에 대한 알바니아계 주민들의 시위가 확산되었습니다. 세르비아는 1998년 5월 3일 대규모 소탕작전을 전개하여 수십명의 알바니아계 반군을 사살하고, 알바니아계 주민을 대상으로 이른바 인종청소작전을 펼쳤습니다. 이를 피해 코소보로부터 탈출하는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1998년 6월 코소보사태에 대한 개입을 선언한 미국과 유럽연합은 NATO병력을 코소보 주변에 배치하고 코소보로부터의 세르비아 병력의 철수, 잔혹안 인종청소의 중단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세르비아군은 이를 무시하고 1998년 8월 코소보해방군의 주요거점을 함락시켰습니다. 1998년 NATO는 세르비아에 대한 무력 사용을 결정했습니다. 그러자 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1999년 2월부터 3월 말까지 몇 차례에 걸쳐 서방측과 코소보 평화 협상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협상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3월 24일 NATO는 유고연방에 대한 공습을 시작했습니다. 6월 3일 마침내 세르비아 의회가 UN 평화계획을 승인했습니다.
2. 아프간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국제무대에서 맹위를 떨쳤던 영국이 19세기와 20세기 초에도 군사적인 장악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뒤 몰의 길을 걷게 한 무대였습니다. 유라시아 대륙 중앙부에 위치한 아프가니스탄이 '침략자의 무덤'이라는 별칭을 갖게 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영국은 1839년, 1879년, 1919년 3차례 아프가니스탄 장악을 시도했으나 이를 모두 실패했고, 그 후 힘이 빠져 패권 시대를 마감했습니다. 소련은 1979년 아프간을 침공한 뒤 5만 병력을 잃고 1989년 철수했습니다. 소련은 우세한 무기와 병력을 이용하여 아프가니스탄을 순식간에 점령하지만 산이 많은 아프가니스탄의 환경을 이용한 무자헤딘의 집요한 공격을 받으면서 끝없는 소모전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고, 결국 많은 피해를 입은 채 철수하게 됩니다. 전문가들은 현대 무기로 무장한 소련마저 무릎을 꿇은 데는 외국군의 작전에 불리한 산악 지형, 복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아프가니스탄 부족의 행동 규범, 외국군에 대한 적대감 등을 그 요인으로 제시합니다. 아프간전쟁의 후유증은 소련 해체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고 평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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