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민주주의는 개인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권리를 선출된 대표에게 위임한 것을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대의민주주의에 의한 정치는 '대표'에 의한 정치입니다. 대표의 개념이 발생한 것은 근대의 일입니다. 대표가 개념이 사용되기 시작했을 때는 주로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신탁이고, 다른 하나는 대리입니다. 그러나 선거권이 확대되고 현대적 정당체계가 확립되면서 위임 모델이 널리 수용되었고 산업화와 함께 계급, 성, 인종 등 다양한 집단으로 균열된 사회구조가 나타나면서 유사대표모델이 나타났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정치학 대의제 모델 - 신탁 모델
신탁관계는 신탁하는 사람과 신탁받는 사람의 관계입니다. 피신탁인은 타인을 대신하여 재산이나 일을 책임지고 관리 해주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신탁으로서의 대표 개념은 일반 시민들이 그 대표자에게 정치적 문제에 관한 모든 일을 책임지고 관리해 달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버크는 1774년 브리스틀에서 행한 연설에서, 브리스틀의 선거구민이 분명 브리스틀의 대표를 선출하지만, 그 순간 그 대표는 브리스틀의 의원이 아니라 바로 영국 의회의 의원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대표는 선거구민의 대리인이 아닌 전체 국가를 위해 일하는 국민의 신탁자로서 자유롭게 사고하고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단 선거에서 선출된 대표들은 독립된 재량권과 객관적 판단력을 가지고 양심에 따라 대표로서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탁관계는 신탁을 부여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들 사이의 지적, 도덕적 대등함을 전제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의 차이가 상당하다는 것이 전제된 것입니다. 일반 시민들은 자신에게 무엇이 가장 유익한지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을 책임지고 관리할 능력도 없기 때문에 지적으로 탁월하고 능력이 뛰어난 대표자를 내세워 일을 처리한다는 것입니다. 신탁으로서의 대표개념을 다음과 같은 비판을 받습니다. 첫째, 대중이 무지하고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속기 쉽기 때문에 대중의 의사와 관계없이 대표가 스스로 알아서 생각하고 판단한다는 것은 엘리트주의적이며 반민주적이다. 둘째, 교육이 복잡한 정치적 문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지만 교육이 대표로 하여금 다른사람들의 이해관계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하는 데 기여한다는 것은 확신하기 어렵다. 셋째, 대표들이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행동하도록 허용할 경우, 자신들의 이기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 급급할 수 있다. 이러한 비판들 때문에 대표 개념의 신탁 모델을 오늘과 같은 평등사회에서는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습니다.
2. 정치학 대의제 모델 - 대리 모델
대리모델의 대표 개념은 대표로 선출된 의원은 이익의 대리 전달자로서 자신을 선출해 준 선거구민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것으로, 대표는 자신을 선택한 유권자의 이익에 충실해야 하고, 따라서 국가 전체보다는 자신을 선출해 준 부분에 초점을 두는 의회 활동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 개념은 지역구의 이익과 지역민의 개별적 이익에 봉사하는 의원 활동을 뒷받침하는 논리가 되며, 따라서 흔히 선거구 봉사 모델로 불리기도 합니다. 이 개념을 옹호했던 사람들은 특히 대의원들과 일반 시민들 사이의 이익이나 견해의 차이가 최소화되는 제도적 장치를 선호했습니다. 예컨대, 대표의 임기를 아주 짧게 정한다든지 국민소환이나 국민발안 국민투표와 같은 직접민주정치의 제도들을 도입함으로써 대표자들에 대한 시민의 통제력을 극대화하는 것도 그와 같은 제도적 장치에 속한다고 할 수 있고 봅니다. 대리로서 대표 개념은 대표가 선거구민에 대해 책임지며 선거구민에 의해 교체된다는 측면에서 모든 정치적 권위는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의회와 정부는 국민의 통제 속에 있어야 한다는 국민주권의 원칙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이 개념은 대중의 참여 기회를 더 넓혀주고, 전문 정치인의 이기적인 경향을 억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비판점도 있습니다. 첫째, 대표자들이 그들의 선거구민의 이해관계에 묶여 갈등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둘째, 정치인들의 지도력과 정치력을 행사할 영역을 제한합니다. 대리모델은 대표의 자유재량권을 최소로 유지하려고 했던 점에서 자유재량권을 극대화시켜주고 있는 신탁으로서의 대표 개념과 대립되는 시각입니다.
3. 정치학 대의제 모델 - 위임 모델
오늘날의 지배적인 대표 개념은 근대 정당제도가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등장했습니다. 현대적 정당체계가 확립되면서 개별적인 정치인들보다는 정당이 대표기구로 부각되었습니다. 정당은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선거운동 기간에 제시했던 정책들이나 프로그램을 수행할 수 있는 대중적 위임을 획득한다는 위임의 원리가 등장했습니다. 이 개념의 모델에 따르면, 의원은 정당의 공천과 정당의 정강, 정책 프로그램을 통해 당선되므로 정당의 입장을 따르고, 정강, 정책의 실현에 공헌해야 합니다. 따라서 대표들은 개인의 자질과 능력보다는 특정한 정당의 이념과 정책에 충실한 정당인의 성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즉 일반시민들은 선거기관을 통해 정당이 제시하는 정책에 지지를 보냄으로써 그 정책을 실천할 수 있는 권위를 위임합니다. 이 모델은 신탁으로서의 대표 개념을 표현하고 있지만 동시에 현대 정당정치에 깔려 있는 위임으로서의 대표 개념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대표자는 선거구에서 선출되지만 전체 국민의 위임을 받으려고 경쟁하는 정당의 일원으로서, 특정 선거구민의 뜻과 이익이 아닌 전체 국민의 뜻과 이익을 대표하는 신탁자로서 자유롭게 판단하고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4. 정치학 대의제 모델 -유사대표 모델
근대 이후 사회는 계급, 종교, 인종 등 다양한 집단들로 균열된 구조를 보입니다. 이 모델은 의회와 정부의 대표는 바로 사회의 균열구조를 그대로 반영해야 한다고 봅니다. 즉 이 시각은 대표자가 자신이 대표라고 주장하는 집단을 대표하거나 이에 유사한가에 기초합니다. 그에 따라 특정 집단 출신의 사람과 그 집단의 경험을 공유했던 사람만이 완전하게 집단의 이해관계와 동일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의회는 사회의 닮은꼴이어야 하고, 의회의 구성원인 의원은 자신을 선출해 준 유권자가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것을 닮아야 합니다. 이 모델은 자유민주주의 대표제도가 사회의 다수집단인 노동자와 여성들을 지나치게 과소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이익이 소외되고 최소화되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에서 등장하였습니다. 따라서 유사대표모델은 의회와 같은 대표제도는 계급, 성인, 인종 등과 같은 사회집단별로 할당되어야 하고 투표자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 내보낸 후보자에게 투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유사대표 모델 역시 비판점이 존재합니다. 첫째, 현실적으로 사회의 구성과 닮은꼴의 의회를 구성할 수 없기 때문에 지극히 이상적인 개념입니다. 둘째, 엘리트 민주주의가 지배적인 현대 대의민주주의의 현실과도 거리가 있는 개념입니다. 셋째, 모든 대표자들이 그들이 속한 집단의 이해관계만을 발전시킨다면 결과는 사회적 분열과 갈등, 그리고 파편화로 나타날 것이며 공공선을 지키거나 공익이 발전할 수 없습니다.
5. 결론
대의민주주의의 이와 같은 네 가지 대표 개념은 정확히 어떤 시점을 기준으로 차례로 채택된 것이 아니라, 사회와 정치 제도의 변화에 따라 서로 교차하고 중첩되기도 하면서 변화했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전통적인 대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신탁이나 대리로서의 대표 개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논쟁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즉, 위에서 살펴본 네 가지 대표 개념 중에서 무엇이 가장 보편적인 개념인가 하는 것보다는 상황과 조건에 따라 적절한 대표 개념의 적용과 활용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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